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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닿는 대로

해인사 3 - 해탈문 지나 대적광전 앞마당으로

by 무소뿔 2008. 10. 15.
자, 드디어 해인사의 불이문(不二門) 해탈문으로 갑니다. 불이문부터는 완전한 불법의 세계라지요. 선악, 생사와 같은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세계를 벗어나 둘이 아닌(不二) 해탈과 법문의 경지로 들어서는 길이랍니다.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 글씨가 우뚝한데, 이 편액은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존경한 만파(萬波)스님께서 고종 2년에 쓰셨다고 합니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불이문까지 계단들 제법 있잖아요. 그거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보았습니까. 해인사 홈페이지에 33계단을 거치는데, 도리천 곧 33천의 궁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해인사 제3문이자 불이문의 다른 이름 해탈문(解脫門)이 선명하고 해인사 한가운데 자리잡은 구광루(九光樓)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9월 10일경으로 기억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불교계 반응이 제법 셌지요. 요즘에는 많이 시들어진 것 같은데... 힘차게 오래 해보시지요. 아뭏든 10승지 가야산에 자리잡은 해인사의 결의가 느껴지더군요. 힘내라, 해인사!!!

일종의 불교회관이라는 보경당(普敬堂)입니다. 규모가 제법 되던데 그 뒤쪽으로 계속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구광루(九光樓) 앞 마당에는 사진처럼 길에 뭔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구광루 맞은 편 쪽으로 범종각이 있고요.

범종각. 그 뒤로 청화당(淸和堂)이 보입니다. 마당에 그려놓은 선,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입니다. 그 모양을 그대로 구광루 앞마당에 그려놓고 참배의 발걸음들을 머물게 합니다. 물론 저도 한 바퀴(?) 돌았지요.


법성게, 종이로 볼 때는 그냥 뭐 부적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하더니 이렇게 마당에 그려놓으니 재밌더군요. 해인사 가시면 꼭 안내판처럼 해보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차분하게 해인도를 보았습니다. 흠... 굿아이디어!

범종각, 가까이 가서 한 번 더 찰칵!

청화당(淸和堂).

청화당 뒷길, 이 길로 오르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찾았다는 학사대 전나무가 나옵니다.

청화당 뒤쪽에서 해인도 방향으로 다시 한 번 찍고.

자, 이제 대적광전 앞마당으로 오를 차례입니다. 계단으로 가는 길 스님들 공부하는 곳인가 출입금지라는 안내표시가 있는데요, 이곳은 궁현당(窮玄堂)이라고 승가대학의 학교건물로 쓰이는 곳이랍니다.

대적광적 앞마당으로 가는 계단에 있는 문입니다.

해인사의 본당 대적광전이 보입니다. 새벽부터 참배객이 와서 기도를 하고 있군요.

보물들이 있는데 살펴봐야지요. 

해인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燈)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 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가 땅과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 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술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우아한 조각 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해인사 3층석탑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탐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2층기단)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것 외에는 별 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불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風鐸)이 달려 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 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논 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항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에는 탲노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놀란의 여지가 있다. 어욱이 근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