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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닿는 대로

해인사 1 - 새벽길 걸어 해인사로

by 무소뿔 2008. 10. 13.
9월 좀 지나 전주에서 볼 일이 생겼습니다. 이튿날은 안동에 가야 하는데 전주 일이 일찍 끝나 아주 머쓱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서울에 갈까 전주에서 하루 머물까 망설이는데 해인사 생각이 납니다. 전주에서 안동 가려면 대전 거쳐 대구 들러 가든가 남원 지나 88고속도로를 타든가 했는데 네비를 찍어보니 무주진안장수로 고속도로가 하나 뚫렸더군요. 망설임 없이 길을 나섰지만 어느새 날이 어두워 해인사 관광단지 여관에서 하루 자고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전날 여관 주인 아주머니 말씀이 새벽 4시쯤 예불이 있다 하셨는데, 뭐 그렇게 일찍 가긴 그렇고 6시쯤 길을 나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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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을 지나 해인사로 가는 길입니다. 어스름 새벽에 산길을 걸어보기도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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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에 다와가는지 신앙의 흔적이 보입니다. 넓적한 바위 위에 작은 칠성단들을 쌓고서 무슨 소원들을 빌었을까요? 절 가는 길에 있는 칠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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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절처럼 해인사에도 부도탑들이 있는데 큰스님들은 따로이 모셨더군요. 이 탑은 자운스님의 부도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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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스님 부도탑과 공덕을 기록한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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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스님 부도탑을 지나니 혜암 스님의 부도탑과 탑비가 나옵니다. 탑의 모양이 종처럼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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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부도탑입니다. 성철스님 사리탑을 설명하는 글을 옮겨봅니다.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 - 나를 찾아가는 禪의 공간

성철스님(1912~1993)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불교 조계종의 6대·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치셨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식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의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정·혜 삼학과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스님의 열반 5주기에 회향하였으며, 여기는 성철스님께서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바로"는 가르침이 살아 있는 선(禪)의 공간이다.
-해인사 성철스님 문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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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242호 해인사 길상탑입니다. 길하고 상스럽다는 이름을 가진 탑이지만, 1966년 해체복원할 때 발견한 탑지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창궐한 도적떼로부터 절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 힘쓰다 희생된 승속(僧俗)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합니다. 4매의 탑지는 23㎝의 정방형으로 두께 2.4㎝의 검은 전판(塼板)으로 만들어졌는데, 명문은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찬(撰)한 것으로서 유명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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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탑 옆 반야사 원경왕사비입니다. 역시 설명 글을 옮깁니다.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 元景王師碑)
고려 중기의 명승 원경왕사(元景王師)의 탑비이다. 원래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었는데, 1961년에 해인사 경내로 옮긴 것이다. 원경왕사(1050~1119)의 속성은 신(申), 이름은 낙진(樂眞)으로 경덕국사와 대각국사의 제자이다. 1104년에 승통이 되었고, 1114년에 오공통혜(悟空通慧)의 법호를 받았다.
1124년에 왕사의 문인 각순(覺純) 등이 비의 건립을 청하여 김부일이 비문을 짓고 이원부가 글씨를 써서 이듬해 세웠다. 고려시대 비문의 해서가 대부분 구양순체를 따르고 있음에 비해 이 비석은 우세남체를 따라 썼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비신의 앞면 위 부분에 "증시원경사왕사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양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 높이 228cm,  너비 105cm, 두께 1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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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입구 맞은 편에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 기념비가 있습니다. 해인사 자체가 아니라 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판전이 세계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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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기념비에서 해인사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伽倻山海印寺가 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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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글씨가 선명한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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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두 개가 난 이 돌들도 지주 같은데, 당간을 세우기 위한 용도보다는 뭔가를 매달기 위한 용도 같은데요. 그 앞쪽 멀쩡하게 생긴 이 비석은 미처 파악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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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여기서부터는 속의 세계가 아닌 진리탐구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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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서 바라보니 저만치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봉황문이 보이고, 고사목(枯死木) 옆에는 한 보살께서 노스님을 모시고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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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枯死木)

이 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별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등 많은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느티나무는 1,200여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