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 과연 경쟁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화두가 되고 있다. 스크린쿼터를 지키자는 쪽은 경쟁력이 없다고 하고, 스크린쿼터를 폐지하자는 쪽은 경쟁력이 이미 충분하며, 설사 경쟁력이 약하다 해도 개방을 통한 세계 일류와의 자유경쟁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리자고 주장한다.
경쟁력, 있나 없나?
지금 한국 영화가 경쟁력을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경쟁력의 근거가 국내시장 점유율이기 때문이다. 국내시장 점유율이 50% 이상이 되든 말든 그것이 한국 영화 경쟁력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미국은 세계 대중음악을 주도한다. 그런 미국의 세계 음악 시장 점유율은 30%에서 40% 사이라고 한다. 그에 반해 영화의 경우 헐리웃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80%에 90% 사이다. 사실상 헐리웃 완전 독점 체제다. 이런 상황에서 알량한 국내 시장 점유율 가지고 경쟁력 운운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 식 논리에 불과하다.
한국 영화 경쟁력 얘기가 나오려면 세계 시장 점유율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지금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세계화 개방 시대 타령인데, 시야가 국경 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통탄할 일이다. 왜 그렇게 소극적인가. 왜 그렇게 패배적인가. 왜 생각의 스케일이 국내 시장 점유율에서 멈추나. 만약 한국 영화 세계 시장 점유율이 30%쯤이나 됐을 때, 이제 우리 영화도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축포를 터뜨리면 내가 흔쾌히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경쟁력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울 뿐이다.
대중음악은 언어와 접근성이라는 천혜의 장벽이 있다. 그것이 팝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독점할 수 없는 이유다. 본질적으로 대중문화 시장에서 미국 흉내를 제대로 내면 성공한다. 음악은 아주 손쉽게 미국 흉내를 낼 수 있다. 트윈폴리오와 신중현, 들국화를 거쳐 서태지에 이른 순간 우리 대중음악은 미국 흉내를 낼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한국 대중음악이 미국 음악을 우리 시장에서 압도하게 됐다. 미국에서 얼터너티브 열풍이 시작됐을 때 우리 가난한 밴드들은 기타 하나씩 들고 싸구려 연습실에서 곧 그 음악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흑인 음악, 모던록 등 어느 선진국의 음악이든지 순식간에 재현할 수 있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도 시장이 존재해야 성장한다. 일본에 비해 한국의 대중음악이 획일화 된 건 한국인의 음악적 재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풍성한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음악도 그런데, 영화는 자본 규모와 시장 규모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영화는 동양인으로 가장 헐리웃 코드에 근접한 작품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이 강점을 발전시키면 아시아 시장에서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산업으로서 안정된 단계가 아니다. 이제 겨우 가능성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음악이 자연적으로 누리는 그런 장벽이 거의 없다. 우리 쇼프로, 공연장에 미국 팝가수들이 대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극장에는 헐리웃 프린트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 영화 제작편수는 극장 영사기를 365일 돌릴 수 없다. ‘검증된 영화’의 ‘안정된 공급’을 원하는 극장주들은 헐리웃이 제공하는 패키지에 혹할 수밖에 없다.
또 영화는 음악과 달리 헐리웃의 작품을 즉시 재현할 수 없다. <터미네이터2>가 나온 것이 1991년이다. 그때가 바로 서태지, 넥스트 등에 의해 한국 대중음악의 사운드가 미국 대중음악을 완전히 따라잡았을 때다. 그때부터 나이트클럽에서 우리 대중음악의 전주와 미국 대중음악의 전주가 그 사운드의 질에서만큼은 구분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터미네이터2>를 재현하지 못한다. 음악은 1억만 들이면 나머진 천재의 노력과 창작으로 상당부분 가능하다. 영화는 천재 이전에 막대한 제작비와 제작인력, 제작기술, 그리고 스크린이 필요하다.
한국 영화는 100억 ~ 300억 원 정도의 제작비를 상시적으로 조달해서 철별로 블록버스터를 배급하고, 그 아래급 영화까지 포함해서 극장에 안정적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 우리 영화 평균 제작비는 40억 원 선이다. 우리 시장에서 이 액수를 뽑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장에서 미국 영화의 제작비는 거의 0 원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건너오는 건 프린트뿐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홍보비 이상만 뽑으면 무조건 흑자다. 미국 영화는 한국 시장에 사활을 건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공격적인 마케팅이 가능하다. 한국 영화는 한국 극장에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극장주 입장에선 홍보도 적극적으로 해주고, 일 년 구색이 맞아떨어지며, 세계적인 스타가 나오고, 이미 해외 흥행실적이 있는 영화 패키지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사업은 도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업은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것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납품업자는 헐리웃뿐이다. 이래도 한국 영화의 경쟁력 얘기가 나올 수 있나?
한국 영화에서 흥행이 예측 가능한 영화는 스타 출연에 검증된 컨셉뿐이다. 스크린쿼터는 한국 영화사들에 흥행의 불확실성을 일정 정도 제거하고 안정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작고 빛나는 영화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거다.
스크린쿼터 같은 보호 장치가 사라지면 극장주는 당연히 예측 가능한 사업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것이고, 그것은 스타 위주의 엇비슷한 기획물이 남발되는 악순환의 함정을 가져올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영화를 안정적으로 소비할 배급망, 즉 시장을 아직 건설하지 못했다는 거다.
금융지원과 배타적인 시장이란 이중의 지원을 한 몸에 받고도 우리 재벌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는데 30~40년이 걸렸다. 영화는 이제 막 시작이다. 지금 어떻게 지원하느냐에 따라 10년 후, 20년 후 우리가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산업을 갖느냐, 못 갖느냐가 갈린다. 과거 중화학 공업 드라이브를 걸었듯이 문화산업을 지원육성하지는 못할망정, 있지도 않은 경쟁력이 있다고 강변하는 것이 정부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개방하고 경쟁하게 해서 경쟁력을 높이자?
웃기는 소리다. 우리 영화가 언제는 경쟁을 안 한 적이 있었던가? 한국 자동차 산업은 경쟁 없이 컸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 외제차를 구매할 자유가 주어졌던가? 외제차는 관세장벽, 비관세장벽 등에 의해 철저히 차단됐었다. 우리 국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국산차를 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오늘날 한국 자동차 공업의 신화가 탄생한 거다.
반면에 영화는 태생적으로 세계 일류 제품과의 항상적인 경쟁에 노출돼 있다. 첫째, 관세 장벽. 영화는 그런 거 없다. 미국 영화라고 우리 영화보다 더 비싼가? 아니다 미국 영화든 한국 영화든 가격은 같다. 소비자들은 똑같은 조건에서 미국영화를 볼 지 한국영화를 볼 지 선택한다. 비디오 가게를 가도 미국 영화와 한국 영화는 나란히 놓여 있었다. 완벽한 경쟁 상황이다. 반면에 자동차는 외제차를 사려면 큰 맘 먹고 거리를 뒤져야 한다.
둘째, 비관세장벽. 외제차를 타면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공무원과 일반 회사원은 외제차를 사선 안 된다는 암묵적인 장벽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영화를 본다고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공무원이 미국 영화 본다고 누가 비난하던가. 오히려 미국 영화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같은 가격에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도록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선망의 대상인 미국 영화와 우리 영화는 맹렬히 경쟁해왔다.
40억 원을 들인 국산 영화와 1000억 원을 들인 미국 영화가 똑 같이 7000 원에 경쟁한다. 다른 부문에선 원가가 비싸면 소비자가도 비싸다. 헐리웃 영화는 경악할 수준의 덤핑공세를 감행하고 있다. 극심한 불공정 경쟁 상황인 것이다. 무슨 경쟁을 더 하란 말인가?
경쟁은 적당할 경우 활력을 높이고 능력을 배양시키지만 너무 강할 경우 개체를 고사시킨다. 특히 아직 어린 개체일 때, 산업의 경우는 유치산업일 때 격심한 경쟁에 노출시키는 것은 그 가능성을 미리부터 거세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다 큰 어른도 너무 격심한 경쟁을 하면 더 이상 능력이 신장되지 않고 오히려 퇴화하는 법이다.
하루종일 선착순을 하는 군인을 생각해보라. 그 군인의 능력이 신장되겠는가? 우리 중등교육은 그 경쟁의 격심함으로 세계에 악명이 높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히 우리 중등교육은 그 내용의 공허함으로 또한 악명이 높다.
산업이라 함은 예측 가능한 것을 말한다. 한국 영화는 예측 가능하지 않다. 주요 제과업계는 판매치를 예상하며 공장을 돌릴 수 있다. 이미 전국적인 유통망이 깔려서 물량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국제경쟁력을 가진 산업이 되기 위해선 국제적인 유통망이 완비돼야 한다. 국내 시장 규모만으론 절대로 100억, 300억대 영화를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이 안정돼야 영화사가 예측 가능한 예산을 짤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 영화사는 국제적인 유통망은커녕 국내 시장 유통망마저 안정되게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스크린쿼터라는 장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장치를 걷으면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안 걸리고는 그때그때 극장주의 선택에 딸린 문제가 된다. 이런 극심한 불확실성 상태에 있는 도박과도 같은 부문을 성숙한 산업이라 할 수 없다. 아직 산업으로서 구조도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유치산업인 영화를 개방 경쟁으로 키우겠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맞는다면 우리 사회의 상식이 무너져야 한다. 일단 각종 아동, 학생 보호, 보육 시스템부터 상당한 수준으로 폐기할 일이다. 보호 받으면 성장을 못한다지 않는가. 세계챔피언이 될 강한 권투선수를 키우려면 체급을 폐기해야 한다. 플라이급이라도 헤비급과 싸우면 헤비급만큼 강해질 것이 아닌가. 비정규직도 보호할 필요 없다. 정규직과 당당히 경쟁하는 가운데 경쟁력이 생길 것 아닌가.
절대로 과장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영화는 헐리웃 완전 독점 시장이다. 스크린쿼터는 별다른 게 아니다. 이런 독점 시장에서 우리 영화를 성장시키기 위해 전 세계 모든 나라에 한국 영화 쿼터를 강제하자는 것도 아니고, 미국에 한국 영화 상영 비율을 강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남한, 이 조그만 땅덩이에 극장 상영 비율만을 40%로 보장해주는 겸손한 보호 장치다.
이것은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최소한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 경쟁으로 경쟁력이 키워진다면 시장 개방을 통해 헐리웃 수준의 국산 영화가 나와야 한다. 과연 그럴까? 스크린쿼터를 폐지하면 우리도 타이타닉을 만들 수 있게 될까?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하는 재경부 관료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지금 실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다
지금 강력 텔레콤이 국내 시장의 80~90%를 독점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겸손 텔레콤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겸손 텔레콤을 보호하기 위해 춘천 시내 시장의 20%를 겸손 텔레콤에 쿼터로 줬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부에선 이제 겸손 텔레콤의 경쟁력이 충분하다며 춘천 시내 쿼터를 10%로 줄인단다. 강력 텔레콤과 경쟁하면서 크라고. 이게 무슨 경우인가?
스크린쿼터는 40%인데 왜 춘천 시내 쿼터 20%로 비유했냐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다. 스크린쿼터는 절대로 영화시장 40%가 아니다. 스크린쿼터는 스크린쿼터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극장 상영일수만을 보장한 것뿐이다.
정상적인 시장에서 극장 수입은 영화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큰 수익은 2차 시장에서 나온다. DVD, 비디오, 케이블TV, 공중파TV 등등. 거기에 캐릭터 상품 시장이 또 있다. 우리 영화사들이 스크린쿼터에 목을 매는 것은 한국 영화의 수익구조가 오직 극장상영에만 달린 기형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극장 수익 비율이 80%)
헐리웃은 자국 극장에서 1차로 돈을 벌고, 다른 나라 극장에서 2차로 돈을 벌고, 다시 자국 DVD, 비디오, 케이블TV 시장 등에서 더 큰 돈을 벌고, 4차로 해외 판권, 그리고 또 캐릭터 상품 판매로 전 지구적인 수익을 얻는다. 한국 영화는 국내 시장에서조차 극장 상영 이외에는 수익을 얻지 못한다. 한국 영화산업이 도박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다. 극장 상영은 가장 부침이 심하다. 2차 시장의 매출은 상당히 안정적이다. 우리 영화는 오직 극장 시장의 변덕만 바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크린 쿼터 같은 안전장치의 의미가 더 커지는 것이다.
이제 겨우 한국 영화에 해외판권판매라는 새로운 수익 창구가 보이고 있다. 이제 막 이륙의 기미가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겸손 텔레콤이 춘천 시내 20% 쿼터를 발판으로 경쟁력을 키워 인근 군에서도 가입자를 유치하기 시작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춘천 시내 20% 쿼터의 수익이 회사 존립 기반이다. 전국 단위 소비자들은 겸손 텔레콤이라는 회사 자체를 모른다. 강력 텔레콤이 수퍼스타를 앞세워 전국 방방곡곡에 광고를 퍼부을 때 겸손 텔레콤은 광고는커녕 제품개발비도 강력텔레콤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형편이다. 겸손 텔레콤은 항변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경쟁하라고?”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선 공공부문이 아닌 이상 한 기업이 시장의 80~90%를 독점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독과점은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후발주자의 진입을 막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은 공공부문의 독점까지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SK 텔레콤의 점유율을 규제하면서 후발주자인 KTF와 LG 텔레콤의 성장을 돕지 않는가.
SK 텔레콤의 시장 점유율이 50%만 넘어가도 독과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런데 헐리웃의 80~90% 독점을 보면서는 왜 꿀 먹은 벙어리인가. 80년대 한국 자동차의 국내 점유율이 거의 100%에 달할 때 한국 자동차 산업의 성장을 위해 대대적인 외제차 타기 운동을 벌이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아직은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일 터. 영화는 국내 시장 점유율 50%로 국제 경쟁력이 생겼다니, 왜 한국 정부는 잣대가 시시때때로 달라진단 말인가.
이제는 국가브랜드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다. 정부 스스로도 요소투입형 성장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창조성과 문화의 시대다. 영화는 문화산업의 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영화 자체는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단지 우리 영화가 국제적으로 널리 상영만 되도 한국의 국가 브랜드는 다른 차원으로 상승한다.
스크린쿼터를 줄이든, 혹은 폐지하든 한국 영화의 씨가 마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 시장 30%, 40%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 영화 산업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영화는 일류 선진국이 반드시 갖춰야 할 소프트파워의 핵심 소재 중 하나다. 굴뚝 없는 산업이라는 관광 산업을 위한 중요한 인프라이기도 하고, 국내 산업 경쟁력이 세계 일류로 올라서기 위해서도 영화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명품과 일반 공산품의 차이는 단지 기술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에 대한 선망이고 이미지다. 영화는 제조업 분야에 항공 산업, 자동차 산업이 하는 역할과 같은 막대한 파급효과를 문화산업부문에 발휘한다.
어처구니없는 개방경쟁논리, 스타들과 몇몇 상업영화들에 대한 악감정으로 한 유치산업이 이제 막 기적을 창출할 수도 있는 중대한 국면인 이 때 우리가 실기한다면, 그것도 정부 주도로 실기한다면 우리는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월간 문화예술 2006년 5월호에서. 하재근, 데일리서프라이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