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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닿는 대로

새남터 성당

by 무소뿔 2013. 6. 30.

새남터. 조선시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한 곳. 후기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처형되어 조선의 유적이 아닌 천주교의 성지로 변한 곳. 전시관 속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의 지식인들이 남긴 문서들을 보니 신앙을 넘어 대단하다는 생각이... 어렵게 선교를 시작했으니 개독처럼 망가지지 말았으면 하는데 유일신 신앙이 어디 갈지...


조선시대는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였으며, 때로는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던 사육신이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그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로는 주로 천주교신자들의 순교지가 되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의 모래사장으로, 일명 ‘노들’ 또는 한문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라고도 한다.

즉,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L.M.J.)·모방(Maubant, P.)·샤스탕(Chastan, J.)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첫 한국인 신부이었던 김대건(金大建)과 현석문(玄錫文) 등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Berneux, S.F.)와 도리(Dorie, P.H.) 등 5명의 서양인 신부들과 정의배(丁義培)·우세영(禹世英) 등 많은 한국인 신자들이 이곳에서 군문효수에 처하여졌다.

이렇듯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므로 한국천주교에서는 1950년 새남터로 추정되는 인근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기념지로 지정하는 동시, 1956년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세웠고, 1984년 새남터순교기념대성전이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이 성전은 종래의 서양식 교회건축양식을 탈피한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전시관·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