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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같은 글

홍세화 수요편지 : 나눔과 분배

by 무소뿔 2006. 2. 2.
제15호 2006년 2월1일(수)
나눔과 분배


사회양극화가 시대의 화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신년 연설에서 양극화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사회 양극화 극복을 위해 조세 부담을 늘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로섬 게임이 관철된다고 하면, 양극화의 극복에는 두 개의 방안 이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입니다. 하나는 ‘나눔’이고, 다른 하나는 ‘분배’입니다.

‘나눔’은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말은 분명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나눔’이 ‘독차지’의 반대말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면, 분배는 ‘성장’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 가진 쪽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들도 ‘나눔’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나눔’에는 무척 관대합니다. 그러나 ‘분배’에는 관대하기는커녕 반대로 일관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눔은 사적 영역이고, 시혜, 온정, 베품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분배는 성장의 반대로서 공적 영역이고 제도에 의한 강제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나눔’으로 ‘분배’의 요구를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분배의 제도화를 바탕으로 나눔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려고 할 때 분배의 제도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이라는 벽과 부닥칩니다. 우리 사회에서 현실은 바꿔나가야 할 현실의 뜻보다 피할 수 환경의 뜻이 훨씬 강합니다. 분배의 제도화를 비롯하여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너무 몰라”, “너무 순진해”, “이상주의자”, “근본주의자” 등의 말이나 딱지를 선사받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에서 멈추면 다행입니다.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의 의미만 가질 때, 그래서 각자의 세계관에 반해 현실을 수용해야 할 때, 그것은 세력관계상 거의 강자의 뜻을 수용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점차 강자에게 관대해집니다. 사람들은 북한보다 미국에 관대하고, 대기업노조보다 재벌에 관대하고, 한겨레보다 조중동 헤게모니에 관대하고, 진보세력보다 현실 정치권력에게 관대합니다. 그렇게 현실의 벽 앞에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그 내면에서 반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런 현실을 주로 같은 약자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현실은 더욱 바꾸어야 할 것보다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남습니다. 사회양극화의 극복 방안이 분배에 있을지 나눔에 있을지 질문을 던지면서 되돌아볼 일이 아닐까요.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 드림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 홍세화의 똘레랑스 http://wnetwork.hani.co.kr/hong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