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의 <대화> / 양심적 지식인이 던지는 반세기 반성史 리영희 선생이 대화 형식을 빌려 쓴 자서전 <대화>는 지난 반세기를 살아온 양심적 지식인이 한국 현대사에 날리는 통렬한 반성적 회고이다. 기자와 교수로서, 아홉 번의 연행과 다섯 번의 기소(유예), 세 번의 징역을 겪으면서 선생은 정직한 그리고 무지막지한 양의 독서와 집필을 통해 한국 청년과 일반 지식인의 의식을 깨워왔다. 한국 정치와 시민 사회가 모두 극단적 우익반공주의와 퇴영적 물질주의에 함몰되어 있을 때, 이른바 '대항 헤게모니'의 구축을 위해 이처럼 철저히 자신을 소비했던 인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선생의 수많은 저작들이 생생히 증명하여 주듯 선생의 생애는 ‘남한 사회에서 믿어오던 허위와 여러 크고 작은 정치적 ․ 사상적 우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에 바쳐졌다. 특히 선생은 냉전시대 한국 정치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을 수많은 1차 자료에 대한 문헌고증학적 분석과 종합을 통해 낱낱이 들추어냈거니와, '미국 군대와 미국의 국가이기주의, 완전히 예속적인 한미 관계의 본질을 훤히 꿰뚫어 보고 알게 된' 그가 미국 비판자가 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부도덕한 헤게모니에 대한 선생의 방대한 국제정치적 탐구는 제3세계 정치와 관련하여 두드러지는데, 예컨대 베트남전쟁에 관한 선생의 문제의식 ․ 분석 ․ 식견 ․ 발언은 이 시대 지식인들의 이론과 실천을 가늠해줄 전범을 보여주었다. 미국보다 한국에 비판의 날 세워 그런 선생이 무분별한 이데올로그일 수는 없었다. 선생에게 이론이 화석화되면 현실과 진실은 죽기 마련이며,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나 반공주의는 다 '자살주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교조화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한때 유행했던 수정주의적 접근과 미국책임론 등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한국전쟁이 스탈린 ․ 김일성·마오쩌둥에 의한 명백한 무력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에게 북한 학문과 역사 기술이 학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일변도의 선전 문건으로 비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개인은 합리적일 수 있지만, 무리는 극히 비이성적'이라는 라인홀드 니버식(式) 혜안은 선생을 민족·집단·계급에 대한 깊은 회의로 몰아넣었다. 미국에 대한 선생의 분노도 집단화된 폭력에 대한 공분이었으며, 사적 반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선생이 미국 국민을 미국 정부에 의한 프라퍼겐다의 희생자로 간주한 것이나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폭로한 미국의 인텔리겐차와 주요 언론에 대한 한없는 존경을 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선생은 미국에 대해서보다 훨씬 준엄한 비판의 날을 우리 민족에게 들이댄다. 그에 따르면, 한국 국민은 지배 권력이 막강할 때는 비굴하다가 자유를 주고 약한 기색을 보이면 돌변해 자기 주장대로 행동하는, 과거나 오늘이나 '민주적 책임성이 결여된' 민족이다. 선생은 근대 한국이 외세에 당한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못남은 도외시한 채 외부의 음모공작에 주된 책임을 전가하는 '민족적 면책론'은 단호히 배척한다. 선생의 뼈저린 민족적 자기 반성은 칼 융의 이론을 빌어 과연 우리 민족이 자율적 자기규제 능력이 있는지 회의적이라는, 보다 절망적인 민족기질론으로까지 이어지지만, 물론 그가 바라는 것은 부정에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인의 모든 약점들을 잔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노신의 '국민정신 개혁론'이 그에게 각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예수교에 소름이 끼친다" 무엇보다 선생이 자서전 곳곳에서 미국이나 한국사회 이상으로 혹독한 비판의 각을 세우는 대상은 한국 기독교다. 그는 한국 사회에 인간소외, 이기주의, 범죄가 체질화된 것을 보면서 '이런 인간형과 사회가 그래도 북녘 땅의 인간과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건가'라고 탄식하지만, 여기에서 '한국 사회'와 '북녘 땅'을 각각 '한국 교회'와 '교회 밖의 세상'으로 대치해도 선생에게는 차이가 없다. 그가 경험하고 배운 한국 기독교는 '동학교도를 처벌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종교'이며, 목사라는 사람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국군에 대한 축도와 인민군에 대한 저주의 말’을 중얼대는 종교이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밀가루를 주는 대가로 예수교를 선전'했던 종교이며, ‘극단적 반공주의에 물든 서양 숭배적 종교’였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 기독인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에 굴하고, 이승만 독재체제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박정희 유신독재시대에는 폭력적 권력과 유착했고, 전두환 살인정권 시절에는 조찬기도회로 분주했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미국이라면, 마치 미국인이 된 듯 황홀해지는' 이 땅의 기독인과 '미국이 침략 전쟁으로 전세계의 규탄을 받아도 남한에서만은 예수교 신자들의 사랑을 받는' 현실을 개탄한다. 한국 교회가 가장 왕성한 성장을 할 때에 한국 사회가 겪어야 했던 인간적 참상을 떠올리면 지구상의 최대교회 50곳 가운데 한국 교회가 상위 23곳을 차지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한국 국민에 대한 저주인지 축복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선생의 고백 앞에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이제 과연 '한국 교계에서 더 이상의 신학 논쟁이 필요한가'라는 선생의 질문에도 할 말을 잃는다. '기독교라는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사상과 행동의 궤적으로 볼 때,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창조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에게는 오히려 축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나는 사랑의 종교라는 예수교에 대해서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라는 선생의 말에 모골이 송연하다. 진정 한국 기독교는 인간을 창조한 신을 멋대로 재창조함으로써 창조되지 말아야 할 신을 만들어왔는지 모른다. 영국의 극작가며 사회이론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현대 자본주의가 해적 행위를 용기 있는 애국 행위로, 노예 노동을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한 상업 행위로 간주했던 경건한 기독교 기업인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관찰한 바 있다. 경건과 정직을 가장 파렴치하고 역겨운 악행과 결합시키는 오도된 일원론 내지 뻔뻔한 이원론은 오늘날 '부시 하나님'을 만들어 열광하며, 증오와 전쟁을 선동하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선생은 현세에 집착했고, 현세를 누구보다 철저히 살아왔다. 내세를 믿지 않으면서도 내세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현세에서 실천하기 위해 부단한 극기와 희생을 실천하려 했다. 부패한 한국 교회에 깊이 침윤된 이원론적 신앙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경지다. 우리가 믿는 내세가 현세를 견인하지 못한다면, 그때 기독교는 정말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도)의 모습 앞에서 선생은 '예수님의 얼굴이 보고 싶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통렬한 연민 갖고 읽어야 내가 한국 기독교에 대한 선생의 비판이 때로는 불공평하다고 느끼면서도 결국 할 말을 잃는 것은 선생이 살아온 삶 때문이다. 선생의 사상 거처가 어디든, 자기가 진리로 믿는 것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 이러한 일치에의 노력이야말로 살지 않으면서 가르치려만 드는 한국 기독교가 배워야 한다. 이 책이 오늘날의 한국 기독인에게 주는 가장 큰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과 복음의 정신이 교회 밖에서 더 잘 실천되고 있다는 충격일 것이다. 우리는 통렬한 자기 연민을 가지고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나는 '미국 군대의 포탄과 고엽제와 기총소사로 수없이 죽어간 베트남인들의 죽음과 고통과 눈물'을 생각하며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취했어도, 고통받는 베트남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라는 선생의 말에서 선생의 이론과 투쟁을 이끈 저력을 보았다. 나는 5년 전 뇌출혈로 반신마비가 된 후 회복되고 있는 선생이 정말 오래오래 살아서 한국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살아있는 전범으로 남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땅의 기독 청년들이 이 '비'기독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와 마땅히 가져야 할 문제의식의 일단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자신은 죽기까지 무신론자로 남게 되리라는 선생의 고백이다. 나는 선생의 이런 고백이 성급한 것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한국 기독교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거나, 보아왔다는데 있다. 고세훈 / 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부 교수 | ||||||||||||||||||||||||
2005년 05월 25일 19:37:26 |
내 맘 같은 글